이해하고 나면 아하, 그러면서 무얼 이리도헤맸나 싶은데 그 이해의 순간까지는 정말고롭고 또 고롭다.무얼 말하는 건지, 어디를 말하는 건지, 왜 그렇다는 건지, 나한테는 아직 당연하지 않은데 왜 자꾸만 당연한 것처럼 넘어가고만 있는 건지…. 아우아오아으우와아아 속은 갑갑하지 머릿속은 때가 잔뜩 낀 것처럼 뻑뻑한데다 지끈거리기까지 하지, 그럴 때면 속으로 막 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 말이었구나, 이렇게 된다는 거였구나 하면서 한 순간 환하게 보여질 때 그 때는 그냥 힘이 다 빠지는 것도 같고, 노곤해지면서 방바닥으로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휴우, 하면서 긴 숨과 함께. 여기, 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의 팔작구조와 씨름하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제 알았다 싶고 나면 그닥 복잡하지도, 어려울 것도 없는 것을. 한 번 막히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 꽉 막혀 답답답답.

이 나이가 되도록 나처럼 제주도 한 번 가보지 못한촌놈이 또 있을까. 물론 가볼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대학 때는 수학여행이 그 쪽이었는데 가질 않았고,그 섬에있는 도서관과 작은학교들에서 몇 차례의 강연 요청이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사삼 기행 따위 프로그램을 따라 갈일도 있었지만, 글과그림 졸업여행이 있기도 했지만아무튼 여태 제주도 한 번 가보지 못한 촌놈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저기에는 꼭 가보고 싶다 하고 꽂히는순서가 나름 세워지는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아마 이렇게 건물 하나씩 살피면서 가보고 싶다고 꼽아지게 되는 중요한 까닭 중 하나는 그만큼 나를 애먹인건물일 때. 화딱지가 나서라도 직접 가서 눈으로 살펴 확인을 하고 싶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 제주. 관덕정.

* 사진들은 여기,여기,여기, 여기에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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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작지붕의 구조

05.제주 관덕정 (17C 전후)

옛 제주 관덕정의 모습

제주 관덕정은 17C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는데, 몇 해 전에 수리를 했다. 이 건물 또한 일제시대에 많이 훼손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 건물이나 거대한 관아 소속 건물들, 거대한 병영 관련 건물들을 학교나 마을회관 같은 용도로 쓰게 하면서 자연스레 훼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심포 건물 양식으로 살펴본 여수 진남관 같은 건물도 초등학교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일이 있다.아무튼그렇게 되어많은 관아 시설이나 병영 시설들이 일제강점기에 파괴가되었는데, 이것은 앞서 한국건축사를 공부하면서우리에게 관아 건축물들이 그리 남아있지 못하게 된 까닭을 살핀 것과도 일맥통한다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한 나라가 쇠하고 새 나라가 들어선다거나 왕조 혹은정권이 바뀔 때는 이전 중앙권력의 통치기관들을 허무는 경우가 많았다 하던 것처럼 말이다.

1962년 관덕정, 처마가 훼손되어 있다.

일제시대에는 아무래도 조선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마치 조선 백성을 위한 거라는 명목으로 '왕이나 지배층, 권력자들만 이용하던 시설을 일반인들도 쓸 수 있게 해주겠다'며 관아 건물들을 개방하면서 자연스레 그러한 시설들이 훼손되게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해놓고는 사실 그 안에 그닥 볼 것이 없으니 미술 작품들을 설치하고, 동물원도 들여놓고 하면서 자꾸 구경거리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는 그러한 시설들을 들이기 위해 거꾸로 기존에 있던 전각 건물들을 헐어야 한다고 하나둘 헐어버린다. 또는 그 안으로공원이나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해야 하지 않느냐 하면서건물을 헐어내고 말이다.

잠깐 옆으로 이야기가 새기는 하겠는데 사실조선에는 도성 안에 공원이라는 게 거의 없다. 파고다 공원이라는 것도 지금에 와서야 공원이지폐사지일 뿐이었다.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그렇게 공원이라 하는 것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것은한국 사람들이 그러한여유나 정서가 없어서가 아니라정원이라는 것을 만드는 의식구조가 일본인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한국건축사를 공부할 때도 짚었듯이 정원이라는개념은 사실 일본에 적합한 말이다. 우리는 정원이라기보다는 원림개념으로 봐야 옳은데,말하자면 우리는 자연의 공간을 원하면 인공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 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별서라든지 하는 것을 산 속에 만든 것도 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에 반해 일본 사람들은 자연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 집 마당 안으로 만드는쪽에 있다. 정원을 만든다거나 그러면서 더 나아가서는 돌이나 자갈돌 같은 것을 갖다 놓고 기암절벽 모양이니 계속 모양이니 하면서 꾸미고, 조그만 나무인데도 가만 보면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는 것들로 분재 같은것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연을 자기공간이나 마당 안으로인공적으로 은유해서 만드는 것을 좋아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제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자연을 느꼈고, 실제로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떠마실 수있는 그러한 곳을 찾아 그 공간에다 집을 짓거나 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성 안에는굳이 공원이니 정원이니 하는 것을 만들 필요나 까닭이 없었다. 창덕궁 후원도물론 못을 조금 파기는 했지만 아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있는 자연을 그대로 쓴 거였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제시대에 관아시설들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제주 관덕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겹처마이던 것을 홑처마로 줄이면서 처마길이를 굉장히 옹색하게 짧게 해놓았다. 그래서 그것을 최근 겹처마를 살리면서보수했다.

2006년, 복원된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도에 있는 관아 시설이었으니당시에는 육지에서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하지만조정에서는 그곳을 관리하고 통치해야 했으니파견관을 보내기도 하고, 과거시험이니 군사훈련 같은 각종 의식과 행사를 치룰 공간이 있어야 했다. 과거시험만 해도 당시에는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를보는 게 아니라 섬 안에서 대신 쳤는데 이는 도서 지방이기 때문에 어떤예외가 적용되어 그러했을 것이다.그것을 이 관덕정에서 치루면서 그앞뜰에서 과거 시험을 보는 등나라의 공식 행사들이 대신 거행되던 곳이 바로 이 관덕정에서 이뤄졌다. 군사훈련이라던지 하는 것도그랬고말이다.관덕정 옆에는 관아가 있고, 관아의 담벼락도 따로 있기는 한데관덕정 앞에는 뜰을 만들어놓고그러한 공식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두었다. 그러니 정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제주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관아 건물이 바로관덕정이라 할 수있겠다.

건물을 보면 전면의 기둥들 사이에 예쁜 모양으로 둘러져 있는 게 모이는데 그러한 부재를 낙양각이라 한다. 낙양각은 주로 왕이 있거나 위계가 높은 공간에 설치를 하곤 하는데, 경회루에 가 보아도 전면이 모두 낙양각으로 초각을 해서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안에서 내다봤을 때 이 낙양각이 없다면 바깥의 풍경은 하나의 네모진 사진틀을 통해 보는 것처럼 될 텐데, 낙양각이 있음으로 해서 그 사진틀이 좀 더 예뻐지는 효과를 가져준다. 물론 바깥에서 볼 때도 예쁜 모습이지만 주로 내부에서 바깥을 내다볼 때 장식된 액자와 같은 틀이 되게 하는 효과를 위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이 장식적 효과라면 이 낙양각에는 구조적 기능 또한 있는데, 그것은 이 낙양각이 설치 되는 곳들이 벽체 따위가 없는 항상 개방되어 있는 곳이라는것에서 알 수 있다.벽체가 없는 곳에서는 칸 공간을 잡아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뒤틀림이라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는데, 이 낙양각이라는 부재를 윗부분에 기역자 형태로 설치를 해주면 그 뒤틀림을 어느 정도 잡아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크게 잡아주지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말이다. 한 곳에만 설치를 하는 게 아니라 쭉 돌아가며 모두 설치를 하게 되면 그 개방된 칸의 뒤틀림을 잡아주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건축에 들어가는 모든 부재, 모든 공정이라는 것이, 힘을 들이고 공을 들여 할 때는 어느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이중의 효과, 여기에서와 같이 장식적인 효과와 구조적인 효과처럼 둘 이상의 효과를 생각한다. 다른 건물들을 볼 때도 그런 것을 계속 염두에 두며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장식이 예쁘게 되어 있다 하여 그런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식재가 들어가는데에는 언제나 구조적 이유가 숨어있기 마련인데, 그 구조적 기능을 수행하느라 만드는 것에 기왕 하는 거 더 예쁘게 만드는 거라 생각을 하고 보아야 한다는 말씀.

정면을 보면 퇴칸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 있다. 제주도에는 시커멓고 구멍이 많이 뚫려있는 현무암이 많이 나오고, 실제로로 제주도에서는 현무암을 많이 써왔다.화강암보다야 강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건물을 지을 때마다 화강암을 구하기 위해 육지에서 계속 들여올 수 없는 노릇이니지역에서 해결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박석을 깔아놓았는데,이것은 구워서 만든 것이 아니라 돌을 깎아 방전과 같은 형태로 돌을 만든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전돌이니 방전이니 하는 전돌을 잘 굽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면, 옛 문헌에서도 신하들이 왕에게 우리도 전돌을 구워 전축성을 쌓자고 상소를 올리는 것이 보이기는 했다. 수원 화성을 쌓을 때도 전축성을 쌓자, 전돌을 만들어 성벽을 쌓자, 그게 중국에서도 유행을 하고 여러가지 잇점이 있다… 면서 말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않곤 했는데, 그러했던 이유는 전돌이라는 것은 구워서 만들어야 했고, 그러려면 땔감이 많이 필요하다. 땔감을 구하려면 나무를 자꾸 베어야 하는데, 당시에도 나무가 충분히 않았으니 전돌을 구워서 쓰는 방식을 피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온돌을 깔아 생활했으니 전돌을 굽는 데 쓰는 것보다 온돌을 덥히는데 나무를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장번을 굽는 것을 자제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우리는 온돌 위에서 좌식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평평한 돌을 깔아 그 위는 미장을 하고, 그 위에 장판을 깔았기 때문에 굳이 중국 같은 곳처럼 평평한 바닥을 구성하기 위해 방전을 계속 깔아야 하는 필요성이 적기도 했다. 만약에 우리도 입식 생활이었다면 전돌을 더 많이 사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이 관덕정 건물에서 보자면, 제주도라는 곳은 더더욱 큰 건물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굵고 좋은 나무들이 귀한 데다 워낙 바람이 많은 지역이어서 나무가 풍부하지 못하다. 그랬으니 구운 전돌을 사용하기에는 조건이 더 좋지 못했을 것이고, 어쨌든 이 관덕정의 퇴칸에는 돌을 굽지 않은 채 깎아 만든 박석을 깔아두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낙양각이 설치되어 있는 퇴칸은 아마도위계가 높은 곳이었을 것이다. 전물을 들여다보면 전면에는 모든 칸에 낙양각이다 있는데 그러한 것이 전면 퇴칸에서 딱 떨어지면서 측면부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전면 퇴칸에만 낙양각을 둘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면 퇴칸이이 건물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공간이라는 것이겠다.그러한 까닭을알려면 당시 사람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사용했는지를 이해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에는 조선시대 어느 화가가 제주도의 풍습이나 생활 모습들을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 보존되어 있다 한다.그 가운데 관덕정을 그린 것이 있는데,건물의 앞뜰에서 과거를 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것을 관장하는 지방관이 퇴칸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전면의 퇴칸은 어떤공식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지방관이 앉는 공간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공간이 가장 위계가 놓은 곳이 되는 것이며, 그 공간은 협소하면 안 되는 것이다.물론 퇴칸을 아주 크게 가져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앉아 자기가 하는 일을 수행하기에 불편함이 없을정도는 되어야 하니 말이다. 실제 이 전퇴칸의 크기도 딱 그 정도의 크기이다. 의자를 놓고 앉아 마당에서 치러지는 행사를 관장하기에 적당한 크기.

휴우, 이제 이것을 말하기 위애 지금껏 관덕정에 대한 주변 얘기들을 풀어온 것이다. 지금 공부하고자 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구성 방식. 지방관이 의식을 관장하는 저 자리, 그래서 건물에서 위계가 가장 높아진 저 자리는 바로 건물의 전퇴칸이었고, 이 퇴칸이 측면으로도 돌아가고 있으니 측면 퇴칸도 전퇴칸에서 필요했던 것만큼이나 폭이 넓다는 것이다. 정면과 측면에서 보는 퇴칸 폭이 같은지는 추녀를 보면 알 수 있다. 45'로 올라간 추녀. 그래서 측면에서도 덩달아 퇴칸이 넓어져버렸다. 쓸모가 커서 퇴칸을 크게 했다기 보다는 전퇴칸과 폭을 맞추기 위해 넓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내부 구조를 보면 측면의 기둥머리에서 출발해 올라가는 부재가 있다. 보이기에는 충량과 같은 형태이지만 위에서 무언가를 받고 있지는 않다. 그 위를 보니 외기도리라거나 하는 것이 나와 있지를 않아. 충량이 구조재로서 역할을 하려면 외기도리가 측면 퇴칸의 어느만큼까지 나왔을 때 서까래를 받는 그것의 하중을 충량으로 내려보내는 것일 텐데, 퇴칸 쪽으로는 아예 외기도리라는 게 더 나와 있지를 않는다. 외기도리는 내진주가 끝나는 그 위에서 그냥 끝나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진고주 위에 외기가 형성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측면서까래들이 외기 위로 올라갔을 때 발생하는 하중은 바로 내진기둥으로 전달이 되니 충량은 받아줄 것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살펴보면, 내진 공간에서 대들보들은 내진기둥들 사이로 쭉 올라가고 있지만 내진주가 끝나는 부분에는 올라가고 있지를 않다. 그 측면벽부 바깥에서는 서까래들이 올라오게 되는데, 이 대들보가 그대로 내진주의 끝에서도 걸쳐지게 된다면 그 서까래들을 받아줘야 하는 자리에 있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전면과 후면은 중도리 위로 서까래가 올라가 있는데, 측면에서 대들보 위로 서까래를 건다면 대들보의 춤이 중도리보다 한참 높기 때문에 서까래들의 이가 아주 달라지게 된다. 서까래들의 높이가 달라질 뿐더러 추녀가 결구하는 데에도 애매해지는 상황이 된다.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으니 추녀를 온전히 걸 수 없으니 말이다.굳이 그 상태로 추녀를 걸려 한다면 대들보를 추녀 높이에 맞춰 깊게 깎아내던지 아니면 중도리 쪽에무언가 보강해서 높이를 올려주던지 해야 한다. 그렇다고 추녀만올려준다고 해결이 되는 문제도 아닌 것이 추녀가 따라 올라가면 추녀 옆의 선자연들도 따라 올라가야 하고, 선자연이 올라가면 평서까래들도 다 따라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 평서까래들이 따라 올라가려니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는 높이를 맞춰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면 이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어떻게 했나 기억을 더듬어보면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측면 서까래들이 대들보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종보 위로 올라간 거였다. 종보는 대들보보다 상대적으로 춤이 작다. 게다가 고려시대 건물들에는 대들보를 이렇게까지 크게 쓰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덕정에서는 내진주가 끝나는 기둥 사이에서는 대들보를 반복시키지 않고 대들보의 자리에 중도리의 춤이 돌아가게끔 도리를 올렸다. 그런 뒤에 그 도리 위로 동자주를 올려 합각부의 하중을 받게 하고 있는데, 다시 말하면 합각의 하중이 동자주를 통해 도리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리라는 부재가 그 많은하중을 받아낼 수 있겠는가? 도리라는 것은기껏해야 서까래 정도를 받는 부재인데, 이렇게 측면에 동자주를 통해 내려오고 있는 합각 전체의 하중이라면 도무지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기둥머리들을 잡아주는 창방까지는 내진공간의 가구 형태 그대로 가지만, 내진주가 끝나는 기둥들 사이에는창방 밑에 굉장히 춤이 높은 장혀와 같은부재를 이중으로 겹쳐 그 하중들을 함께 받는 것이다. 다른 기둥들 사이에서는큰 힘을 받는 게 없으니 기둥들을 잡아주는 창방 밑으로는 아무 것도 없다.하지만 측면의 내진기둥들 사이에는 창방 밑으로 굵은 가로재를 둘이나 겹쳐 받아줌으로써 합각의 하중을 받느라 발생하는 휨모멘트에 저항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도 불안할지 몰라서 그 중간에다 간주 같은 기둥 하나를 더 받쳐놓기까지 했다.…!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은 이렇게 합각부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또 하나의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건물이지역 내에서 어떠한역할을했고 어떻게 쓰였는지를, 그리하여 그 건물 안에서도 각 공간의 위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그래서 전퇴칸이라는공간이요구하는 폭이 있었고, 그 때문에 측면의퇴칸까지 덩달아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건물의 합각부를 이루는 방식이 왜 이렇게 특이하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결국은 그 공간의 의미, 쓰임새, 역할이고 그 공간에서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건축물 하나의 구조를 안다는 것은 그 건축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끝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아, 여기까지 와서 나는 녹초가 되어버렸다.힘이 다 빠져 널부러져 쓰러졌지만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다. 휴우, 하면서.

"팔작지붕은 상부에 합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건축은 무언가 바뀌게 되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다.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이 그나마 수월한 까닭이 그것들은 그대로 큰 변화없이 지붕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작지붕은 우진각 형태로 가다가 맞배지붕으로 바뀌어야 하니까 그렇게 바뀌어질 때 항상 문제가 생긴다. 건축은 항상 무언가 바뀌게 될 때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런 곳들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윻심히 보고 이해하는 게 포인트다. 어디나 그렇다. 벽면에서도 벽면 구조 단면 한 번 이해하면 그것이 쭉 연속적으로 이어질 때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부재하고 만나거나 벽면이 꺾을 때, 그 꺾이는 부분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지붕 형태도 가다가 다른 형태로 바뀌었을 때 그걸 어떻게 해결했는지. 항상 무언가가 바뀌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들을 잘 해결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고, 그것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길 때 항상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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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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