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훈이

냉이로그 2010. 3. 2. 15:26

조금 전 동훈이에게 전화가 왔다.

"형, 저 지금 가요."

"오늘 떠나는 거니?"

"네, 지금 인천공항으로 가고 있어요."

.

.

.

동훈이가 팔레스타인에 가겠다고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선뜻 먼저 연락하거나 하지는 못했다.하긴, 벌써부터그런 마음이 잘못된 거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왜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부터 생각하게 되는 걸까? 그게 아닌데. 여태 그걸 몰라.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그따위 느낌이 바로 잘못인 거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것을,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거나 힘이 되는, 꼭 당부해야 할 얘기 따위는 한 마디도 없어도 좋은 것을. 그저 귀를 그 아이에게 열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게 다인 것을. 아, 그러지 못했다.

설 전에 전화를 받았으니 벌써 보름도 전이었겠구나. 동훈이에게 전화가 왔다. 형, 요즘은 어디에서 지내느냐고, 팔레스타인에 가기 전에 형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만나는 건 어렵겠다고 했다. 물론 내 요즘 사정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아마 그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부담을 느꼈나 보다. 맑은 아이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저 몇 군데 도움이 될만한 곳들, 팔레스타인평화연대니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같은 단체를 소개해주며 누구누구를 만나보면 좋겠다는 말 정도를 했지만, 이미 아이는 벌써부터 그곳들을 방문해왔고, 자문을 구했고, 더러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랑 같이 가니? 몇이서 가?"

"혼자 가요."

"혼자?"

"네, 혼자 가요."

.

.

.

동훈이를 알게 된 건 이천삼 년 겨울, 이라크에서 돌아와 대학로에 천막을 쳐놓고 소망나무라는 이름으로 밥을 굶고 있을 때였다. 눈물겹게도 그 때는 천막에는 날마다 많은 아이들이 함께 해주었다. 아이들이 학교 마치는 시간이면 더 많았고, 주말이면 더 많았다. 그런데 어느 평일,엄마와 함께 온 한 아이가 인사를 건네왔다. 대전에서 올라왔다고, 학교에는 체험학습 신청을 내놓고 올라온 길이라고. 그러면서 아이는 제가 접은 종이학들로 꾸민 편지와 동생과 함께 모았다는 저금통을 내밀었다.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보내주세요.그렇게 학교까지 빠지면서, 그 멀리에서 왔다는 것에 먼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자기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 하나 내 목에 걸어주었지. 녹색연합 어린이 동아리를 하면서 받은 목걸이였다던가, 가장 아끼고 있다는 물새 목걸이. 마침 그 날은 미국대사관 앞에서 인권단체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었고, 나는 어줍잖은 발언을 하나를 하게 되어 그리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이에게 물어보니 같이 가고 싶다 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얘기도 할 수 있겠니 하고 물으니 얼굴이 빨갛게 되기에 그러면 네가 써온 편지를 읽어보면 어떻겠느냐 했다. 여전히 멋적은 얼굴로 주저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기자회견에서 내 얘기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아이를 소개하며 아이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2003년 12월 13일,6학년이던 동훈이.

그게 첫 만남이었다. 다음 주 반전집회가 있을 때도 동훈이는 엄마와 함께 올라왔고, 그 뒤에도그 단식장에만 몇 차례를 더 다녀갔다.아이는 나를 거리낌 없이 형이라 불렀고, 그 뒤로 내가단식평화순례라는 이름으로, 혹은 어린이와 평화팀 순회강연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곳곳을 다닐 때동훈이는 엄마와 함께 찾아오곤 했다. 그 뒤로도 살람 아저씨를 한국으로 모시는 자리가 있거나 혹은 그 비슷한 모임들이 있을 때도…. 아이는 제천 간디로 중학교에 들어갔고, 더러는 내가 그 학교에 초대되어 가서 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해가 지나면서 녀석은 사춘기를 겪는 것도 같았고, 전보다 말 수가 적어진 것 같기는 했지만 가끔 불쑥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기로 문자 같은 것이 들어오곤 했다.그 뒤로는 오히려 동훈이보다 난느티 님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동훈이 어머니께 더 소식을 듣곤 했다. 그러면서 동훈이의 동생 동민이를 몇 번 더 보았고, 동민이 역시 형이 다니는 간디에 같이 다니게 되었다던가.

지지난 해였나 보다. 지금은 4대강개발이라 이름만 바꾸어놓고는 있지만, 한참 대운하 문제로 온갖 종교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강 순례가 이어지던 때, 한 자리에서는 '강강술래'라는 이름의 청소년 순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쪽 활동으로 관심을 두고 보다보니 동훈이가 그 모임에서 리더격으로긴긴 걷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는 지난 해 겨울 아이가 여기 냉이로그에 몇 자 써놓고 간 것으로 다시 소식을 들었다. 그게 뭐라더라, 무슨 국제 민주교육 한마당이라던가, 여러나라 청소년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그러는데 거기에 한국팀참가단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얼마 안 있어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이 있었고,나 또한 그리로 한동안 집중하고 있을 무렵 여기저기 게시판으로 낯익은 이름의 글들이 올라왔다.당시 함께 회의를 하게 된 여러나라 청소년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Hope Flower' 평화학교를 지원하고자 한다며기금이며 물품을 모금한다는 내용이었다.낯익은 이름이라 했다. 그러나그 낯익은 이름의 아이가 올린 글은 솔직히낯설었다. 그 낯섬은 다른 게 아니라아, 이 아이가 이제는 아이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한 해가 지났다.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이제는 군대를 앞둔 나이가 되었다며 병역겨부를 고민하는 짧은 글을 바끼통에 올리기도 했다. 아, 그런데 그럴 때마다 반가움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먼저 드는 건 어떤 까닭일까? 그리곤 보름 전 쯤 만나보고 싶다는 전화가 있었고, 조금 전에는 이제 곧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아이 목소리는 여전히 앳되었고, 처음 만나던 때 그대로 아주 맑았다.

"그래, 동훈아. 씩씩하게 잘 갔다 와."

"네."

"형이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거기 팔레스타인에는 외국에서 들어와 있는 활동가들이 많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하고 잘 사귀면서 함께 다니고 그래."

"네."

"혹시라도 감정적으로 위험하게 그러지는 마.이스라엘 군인들이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나쁘게 한다고막 대든다거나 그러는 건 오히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대."

"그래요?"

"그래, 어차피 동훈이나 우리는 다들 그곳에서는 이방인일 뿐이잖아.우리야 순간의 정의감 같은 걸로 이스라엘에 대고 막 항의도 하고 그럴 수 있지만, 그렇게 외국인들이 그러고 떠나면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못되게 보복을 하고 그런다나 봐.동훈이가 위험해질까봐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각해서도 그런 건 조심해야 한대."

"네에."

"그래, 거기에서 지내는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하고 잘 사귀고 돌아오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아.그곳에서 당장 무슨 일을 하려 하기보다는 그곳 사람들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그곳 사람들이 살아온 얘기, 살아가는 얘기 많이 들으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면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아. 그렇다고 거기 사람들한테 슬픔이나 아픔만 있진 않을 거거든,우리가 모르는 기쁨이나 즐거움도 많을 거야. 그곳 사람들과 마음으로 만나면서 그런 얘기들 많이 듣고, 나중에 돌아오면 형한테도 얘기해주고 그러면 좋겠다.그렇게 마음으로 만나고, 사귀는 일이 가장 먼저인 것 같아.팔레스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도 그렇게 마음을 깊이 나눈 뒤에, 깊이 나눠가면서그렇게차근차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또 잔소리가 길어졌다. 얘기를 들으면서 동훈이는 네, 네!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될 거야. 정말….

실은 며칠 전 난느티님과 통화를 하면서여쭈어보았다. 걱정은 많이 안 되시느냐고. 아이 앞에서는 부러 그런 걱정이니 위험이니 하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지만,난느티님에게만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걱정은 된다 하시지만 그래도 아이가오래 전부터 가고 싶어하면서 준비해왔으니 믿는 마음이라며. 그러면서한 가지를 더 말씀하시는데 가슴이 철렁했다.혹시 이라크 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묻기도 한다면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면서…. 정식 절차가 아닌 방법으로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없다고, 못간다고 잘라 말했다.가슴이 벌렁거렸다.그런 얘기 끝에 하시는 말씀이 "동훈이가 팔레스타인에 가면서 그 얘기를 자주 해요. 기범이 형이 이라크에 갈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무겁던지.

그러고나서도 아이에게 연락 한 번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 아이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내 모습이라는 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부끄러워. 요사이 살람 아저씨가 자주 꿈에 나온다. 하필이면 일주일 전 참여연대에 가서 약속한 인터뷰를 하는데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 그 때 얘기들을 다시 묻는다. 일곱 차례나 해가 바뀌었지만 바그다드에서는 폭탄 세례가 멈추질 않는다. 그리고 일주일 전, 아프가니스탄에 벌이는 침략전쟁터로 파병하겠다는 계획이 별다를 저항도 없이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억지로 눈을 감아, 귀를 막아 지내오고만 있는 나에게 요 녀석이 흔들어댄다. "형, 저 동훈인데요…" 하고 말을 걸어오면서. 그 때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벌써 어엿한 청년이 되어 "형은 그때 어땠어요?" 하고물어오면서.

2010년, 스무 살이 된 동훈이

동훈아. 이제 네가 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해주렴. '형, 그때랑 지금 달라진 거 아니죠?' 하면서 말야. 알았지? 그래, 씩씩하게 잘 다녀와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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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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