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답사 2

그 날 움직인 순서를 따르자면 마곡사를 먼저 둘러보았고, 그 다음이 무량사, 다음으로 부여 시내에 있는 정림사지였다. 아무래도 날이 저물고 있던 터라 어딘가 여관에 들어야 했으니 읍내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싶은 거였다.

정림사지에 도착, 그곳은 표를 끊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텅빈 벌판 같은 정림사지와 그 가운데 쓸쓸히 서 있는 탑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 마련된 박물관까지 둘러보게끔 되어 있어 나름 관리를 하고 표를 받나 보았다. 그러니 개관과 폐관 시간이라는 것도 있을 터. 정림사지에 닿았을 때는 이미 다섯 시 반이 다 되었다. 여섯 시 폐관이니 삼십 분 밖에 시간이 없어. 함께 간 길목수 형님은 처음부터 정림사지를 코스에 넣지 말자 했는데, 그곳엘 가면 탑 뿐 아니라 박물관까지 둘러보려면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했다. 길목수 님은 이미 지난 주 수덕사와 해미읍성을 둘러보면서 이곳 정림사지 박물관까지 다녀갔다 했으니 둘이 함께 일정을 잡자면 아직 둘 다 가보지 않은 곳으로 코스를 잡는 것이 서로에게 좋기도 할 테니 말이다. 수덕사와 개심사, 해미읍성은 예전에 이미 내가 다녀왔으니, 해서 이번 답사에서는 그 곳들을 빼놓기도 했었고 말이다. 암튼 길목수 형님 말로는 정림사지 박물관에 들어가면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서너 시간은 족히 둘러보게 될 거라 했으니 나 또한 언젠가 다시 가보면 좋겠다 싶었다. 그곳에서 받아온 팜플렛과 안내 자료들을 보니 아마 거기에 가면 백제시대 건축에 대한 전반의 공부를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길목수 형님은 정림사지 말고 아예 다음 답사지인 청양이나 홍성으로 가자 했지만, 아직 부여에도 볼 것이 많으니 부여 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강의록에 부여 가까운 곳에 있다고 나와 있는 정산리 9층석탑도 봤으면 했고, 혹 시간이 되면 부소산성에도 가보고 궁남지의 널다리도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한국건축사를 공부하며 나오던 능산리사지와 군수리사지도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부여청마산성과 부여청산성, 부여나성 같은 곳들까지 하면 부여에서만 하루를 더 보내도 좋겠다는바람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자주 찾을 수 없는 곳이니 한 번 움직였을 때 최대한보아야 할 곳들을 다 봤으면 하는 바람……. 그런데 길목수 형님은 이미주중에 혼자 부여를 다녀가며 몇 군데를 이미둘러봤는지자세히 말은 않았지만 좀 의견이 달라 보였다. 그러니내 바람만을고집할 수는없는 일이었다.최소한건축구조 강의 시간에 대표사례로 살펴본 정림사지 석탑과 정산리 석탑만큼은 잠깐씩이라도 보고 가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탑을 보는 거야 사찰이나궁궐 답사와 달리 그리 오랜 시간이 들 것도 아니니 지나는 길에 잠깐씩 보면 되지 않겠냐며 말이다.정림사지에 가서도 박물관 관람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탑만큼은 꼭 보고 싶다며 그리로 그게 된 것이다. 봐야 뭐 별 것 없다지만, 그래도 백제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석탑 가운데 하나인데 직접 눈으로 봐두고 싶었다. 일부러 그것만 보겠다고 한 나절을 걸려 가야 하는 것도 앙니고 어차피 공주, 부여를 지나는 길인데 하물며 그마저 건너뛸 수는 없지 않겠나 하며 말이다.

정림사지에 도착, 차에서 내릴 즈음 따닥따닥 얼굴을 때리는 우박이 쏟아졌다. 뉴스에서 듣자 하니 서울에는 때 아닌 폭설이 다시 내리고 있다던데……. 마침 그 날은월요일인데다 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랬을까,사지 안으로 들어서는데 입구에서 매표를 하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건지 뭔지, 뭐 어차피 한 삼십 분 남짓황량한 절터와탑만을 보고 나올 거였으니잘 됐다 싶었다.아마 입장료를 냈으면 박물관 관람을못하고 나올 거 생각하면서 무지 아깝다 했을 거야.

공사가 한참이었다. 포크레인이 움직여다니며 땅을 긁어냈고, 흙을 덮었다. 원형복원을 준비하면서 발굴조사 중이라는데 공사 현장은 생각보다 북적거리지 않았다. 포크레인 한 대와 일하는 분들 몇 사람 뿐.

안내판에 유구조사와 유적정비 사업에 대한 내용이 써 있었다. 살구빛으로 표시해 놓은 부분들이 조사와 정비를 하는 구역이라 설명되어 있다. 강당지의 동, 서편과 동회랑지 그리고 중문지와연못이 있던 곳.

정림사지 5층석탑. 꽤 크구나. 일부러 길목수 형님에게 그 앞에 서 보라 했다. 그래야 사진을 찍어놔도 그 크기가 가늠이 되지. ^ ^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라 했는데 이는 자료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다. 어떤 자료에서는 7세기 중반에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강의시간에 배우기를 정림사지 석탑은 의자왕(강의시간에 배우기를정림사지 석탑은 의자왕 때(재위기간 : 641~660)라 했으니 그렇게 보면 7세기 중반이 맞을 것이다.다시 한 번 확인을 하려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거기에는 건립연대를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라 했다. 아마 확실한 연대기록은 없고 학자들이 추정하는 선에서 말하는 듯 한데 박물관에서 설명해주는대로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 정도로 기억해두면 되지 않겠나 싶다. 중요한 것은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후대의 것이라는 것과 함께.

백제시대의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 둘 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백제의 석탑은 그 두 개의 탑을 보는 것이 전부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두 개의 석탑으로 그 시대의 양식을 미루어 봐야 하는 것이며 그 두 개의 석탑을 보면서 당대 다른 지역, 다른 국가의 탑 양식과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해명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두 개의 탑으로 백제시대의 탑 양식을 모두 설명해내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보면 그 두 개의 탑은 어느 한 가지 양식이라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이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흔히 신라계 석탑과 백제계 석탑을 비교하라거나 혹은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논하라는 문제가 나오곤 하는데, 교수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기에 좀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며 말이다. 백제시대 석탑이란 양식이 다른 탑 두 개가 전부일 뿐이니 그 시대 석탑의 양식에 대해 묻는다면 두 탑을 나누어 생각해야 할 거라며 말이다.

미륵사지 석탑이야 언젠가 꼭 한 번은 가서 보게 될 터이고, 그 때 더 자세한 정리가 필요하겠지만, 정림사지 석탑에 대해 정리하려면 어쨌든 미륵사지 석탑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강의시간에 들은대로 정림사지 석탑이 의자왕 시대에 만든 것, 미륵사지 석탑이 무왕 때 건립된 것이라 한다면 뒤엣 것은 아버지 시대, 앞엣 것은 아들 시대에 만들어진 거라 하겠다. 길어야 삼사십 년 차이일 텐데 두 탑의 양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은 아마도 그 시대에는 이 두 탑 말고도 수많은 석탑들이 있었을 거라 추정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나의 건축 양식이 또다른 양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갑자기 획기적인 계기에 의해 변화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과 많은 건축 과정을 거쳐 아주 점진적으로 양식이 다듬어지고 바뀌어진다 할 것이니 말이다. 목탑을 번안한 석탑이라 평가받는 미륵사지 석탑이 만들어진지 삼사십 년만에 갑자기 정림사지 석탑이라는 것이 땅 속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는 없을 거라는 말이겠다.

미륵사지 석탑은 말그대로 목탑을 번안한, 말하자면 돌을 가지고 집을 짓듯 지어올린 탑이다. 돌기둥을 깎았고, 돌로 인방 같은 부재를 만들었고, 돌로 지붕돌을 만들었다. 돌로 수많은 가로재와 기둥재를 교직, 교차하면서 집을 짓듯 쌓아올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림사지 석탑은 그것보다 확실히 아주 간결한 모습을 보인다. 여전히 목탑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야 있지만 많은 부분을 생략, 혹은 석재 구조물에 맞는방식으로단순화하거나승화시킨 모습이다. 그래서 정림사지 석탑을 소개해주는 여러 자료들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늘 뒤따르곤 한다.

"정림사지 석탑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을 가지고 추측해 보건데익산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후에 제작되었을 것이다.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의 양식을 대체적으로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면 정림사지 석탑은 목탑의 모방에서 한 단계 발전해 석탑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탑을 제작할 때 초기에는 나무로 목탑을 만들고 그 이후에 석조탑을 만들었을 거라는 가정하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익산 미륵사가 백제 무왕조(600~641)에 만들어진 것이니 정림사지 석탑은 그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7세기 중엽에 해당한다.(퍼온 곳)"

"부여 정림사지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긴다.(퍼온 곳)"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습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습니다. 세부구성 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줍니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큽니다.(퍼온 곳)"

이제 정림사지 석탑을 부분부분 자세히 살펴본다. 맨 아래에 놓인 돌부터 보면 지대석이 놓여 있다. 이것은 기단이라기보다는 평평한 바닥을 조성하기 위해 깔아놓은 돌로 보는 것이 좋겠다 했다. 그리고 지대석 밑으로는 잡석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이 조금씩 드러나 있는 것 또한 보인다. 그 위가 기단대석이 되겠고, 그 위는 기단부의 바깥면을 두르고 있는 기단면석, 그리고 그 위에 기단갑석이 덮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가구식 기단이 놓인 위로 1층의 탑신부가 있고 그 위로 옥개석이라는 지붕돌.

이 때 이 정림사지 석탑의 기단부를 보면 기단대석이 깔린 뒤 기단면석들이 기단부의 면을 돌려주고 있고, 그 기단면석들 안은 잡석들로 아주 밀실하게 채워놓았다. 석재로 만든 탑이라는 무거운 하중을 고르게 받기 위해서는 아주 견고하고 밀실하게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기단갑석으로 덮고 있는 것이니 말하자면 기단대석과 기단면석, 기단갑석이 하나의 상자를 만들고 있고, 그 안에 잡석들을 빼곡히 채워넣은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기단을 만드는 방식을 두고 가구식 기단이라 하는데, 이것은 백제석탑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 때 미륵사지 석탑의 기단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미륵사지 석탑은 구조 자체가 1층 탑신부의 사면으로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와 통행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하여 기단 채움이 되어 있다. 게다가 가운데에는 심주가 박혀 있으니 그 또한 기단 채움이 피해간다. 그러니 기단의 단면을 보았을 때 통행로가 되는 동서와 좌우의 십자열(심주가 있는 중심부를 포함)에는 잡석 채움이 없고, 그것으로 쪼개지는 네 귀퉁이마다 기단면석이 따로따로 둘러싸주면서 그 안을 잡석으로 채우고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은 워낙 커다란 구조물인데다 석재로 만든 것이기까지 하니 그 엄청난 하중을 받아주기 위해 낮은 기단을 단층으로 썼다. 기단이 낮고 단층인 것은 정림사지 석탑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신라시대 석탑과 견줬을 때 백제석탑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이다.

석탑에서는 재료자체에서 커다란 하중이 있기 때문에 기단부의 지정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래서 그런지 작년도 건축시공 서술형 문제로 이 부분이 나왔다던가? 예전에는 석조 건축물에서는 보통 석탑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뤘고, 그 가운데에서도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을 비교하는 정도로 묻는 정도였다는데 이제는 묻는 방식이 좀 더 세분화되었다 한다. '백제게 석탑의 지정방식과 신라계 석탑의 지정방식을 비교하여 논하시오'라던가?

1층 탑신부를 보면 이 또한 목조 건축의 기법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 그 하나가 기둥돌을 따로 세우고 마치 벽체를 두듯 그 사이에 면석을 두는 것이다.목조기법을 좀 더가깝게 번안한 미륵사지 석탑 같은 경우는 기둥돌과 면석 뿐 아니라 인방 같은 부재까지 쓰고 있지만,정림사지 석탑에서는 기둥돌과 면석만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심지어는 신라계모전석탑인 의성 탑리 5층석탑은 전탑양식이면서도 탑신부를 목조탑을 번안한 양식으로, 기둥 위에 주두와 창방, 감실의 문선과 신방목까지 표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실 '가구식 기단'이니 '가구식 기법'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전통 목조건축을말할 때는너무도 자연스레 '가구법'이라는 말을 써오고 있으면서석조 건축물에 들어서는 그 말이 왜 그리 다가오지 않던지……. 그래서처음에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단이 가구식 기단이라 할 때그게 왜 가구식 기단이라 하는지 알지도 모른 채 그저 기억해두려고만 했다. 게다가 우주와 탱주가 생략된 가구식 기단이라 했던가? 우주는 뭐고, 또 탱주는 뭔지……. 아무튼 그 때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래서 봉정사 극락전은 장대석 기단, 부석사 무량수전은 가구식 기단, 수덕사 대웅전은 장대석 기단…… 그저 외우기에 바빴던 것이다. 솔직히 사진으로 보면 봉정사 극락전의 기단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단은 크게 달라보이지도 않으니 말이다. 장대석과 면석의 구분을 전혀하지 못하던 때.

암튼 이 정림사지 석탑의 1층 탑신부를 보면 우주라 하는 귓기둥의 자리에 기둥돌들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면석이 맞대어 있다. 그런데 이 기둥돌을 두고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하기는 한다. 이 위에 올렸던 석탑 안내판 사진을 보면 배흘림을 두고 있는 거라 나와 있고, 정림사지 박물관 홈페이지에는 민흘림이라 나와 있다. 그 밖에도 인터넷으로 뒤져본 각종 자료들을 보면 어떤 것은 배흘림이라, 어떤 것은 민흘림이라 설명하고 있다. 강의 시간에는 민흘림이라 배웠으니 나도 그냥 민흘림으로 하련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흘림'이 있게 기둥을 썼다는 것일 게다. 박물관 홈페이지에도 다른 문단으로 다시 설명할 때는 배흘림이니 민흘림이니 굳이 명시하지 않고 '1층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엔타시스가 분명한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습니다'고 했으니 말이다. 엔타시스, 흘림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탑신부의 면석을 보면 신라시대 석탑과 다른 점을 하나 더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면석 사이에 이음부가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것도 백제석탑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싶은데, 어쨌든 백제계 석탑은 딱 두 개 뿐이니 이 탑들의 특징이 바로 백제석탑의 특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ㅠㅠ) 이에 견줬을 때 신라시대 석탑은 감은사지 3층석탑을 봐도, 고선사지 3층석탑을 봐도, 불국사 석가탑을 봐도 면석에 이음부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여 각층은 탑신부 위로 옥개석이 얹혀지면서 한 층 한 층 올라가게 되는데, 옥개석에서도 또 한 가지 특징을 살필 수가 있다.탑신부의 기둥돌과 면석 위로 옥개석이 바로 얹혀지는 것이 아니라2~3단의 받침돌을 둔 뒤 옥개석을 올리는데, 이것은목조건축에서 공포를 짜올려 처마를 내미는 것을 석조로 번안한 것이라 해석한다. 이래서 옥개석은 기단보다 넓게 펼칠 수가 있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탑신부 위로 바로 옥개석을 올리려면 이처럼 넓게 올리기가 어려웠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계단식으로 내밀고 나갈 수 있게 받침돌을 둔 것, 마치 목조 건축물에서 포를 짜면서 처마내밀기를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옥개석이 기단보다 더 내민 것 또한 백제 석탑의중요한특징으로 말해진다.신라시대 석탑들은 옥개석이 기단을 덮어줄만큼 내밀고 있지를 않아. 그렇다고 신라시대 석탑들이 옥개석 하부에 받침돌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신라시대에도 옥개석 받침돌을 쓰긴 쓰되 옥개석 처마가 기단을 가릴만큼 내밀지를 못한다는 것이지. 그런데 고려시대에 가서 백제 양식을 이어받은 석탑들은 옥개석 받침돌을 3단으로 쓰고, 그것이 2단일 때는 신라계로 분류를 한다 하는데 이 정림사지 석탑의 옥개석 받침돌은 2단이다. (이건 어인 일인가 몰라 ㅠㅠ. 백제시대 석탑이라고는 둘 뿐인데, 어찌 후대에 가서 백제계 석탑의 옥개석 받침돌을 3단이라 말한다는지. 하도 이상하여 미륵사지 석탑 사진을 찾아보니, 미륵사지 석탑의 옥개석 받침돌은 3단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래봐야 50% 밖에 더 되냐는 말이지. ㅠㅠ 아무튼 그렇다니 그런 줄 알고 있기는 하겠다만.)

이제 처마 부분. (아, 그러고보니 처마 끝이 위로 올라갈 때 밑면도 함께 올라가는 거라거나 옥개석 처마가 기단보다 더 내미느냐 안 내미느냐 하는 이런 얘기들은 언젠가 한 번 정리하듯 썼던 거 같은데…… 아, 무량사!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 있던 5층석탑 사진을 보면서 한참 얘기했더랬구나. 그래서 그 무량사 5층석탑은 처마폭이 기단을 초과하지 않는 점은 신라 양식이면서 단층기단에 처마 끝이 올라갈 때 밑부분도 같이 올라가는 모습들은 백제 양식이라며 말이다. 그래서 고려초기의 무량사 5층석탑은 백제양식과 신라양식을 절충한 형태라며 말이다.) 그렇다, 처마 끝이 올라갈 때 밑면도 같이 올라가는 것을 두고 백제양식이라 했던 것이 바로 이 정림사지 석탑의 처마 끝을 보고 나온 것이다. 미륵자시 석탑의 처마 끝도 마찬가지. (이렇게 두 탑이 같을때야 비로소 백프로! 백제시대 양식이라 말하는 게 안 어색하지 ^ ^) 신라의 탑은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 보듯이 옥개석처마 끝의 윗면이 추녀곡을 따라 올라가지만, 밑면은 평평하다. 그런데 정림사지 석탑에서는윗면 아랫면 할 것 없이 같은 두께로 함께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처마 끝을 잘 보면 풍경을 달았던 구멍들이 각 층마다 보인다. (솔직히 나는 각 층마다, 그리고 처마의 네 귀마다 풍경들이 달려 있으면 좀 이상할 것 같기는 하다. 귀고리를 주렁주렁 단 것처럼. ^ ^;; 그냥 하나 정도 있으면 그게 더 예쁠 것 같은데. 암튼 그렇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강의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바탕으로 정리해본 정림사지 5층석탑에 대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에 찾아들어가 봤더니 이 석탑의 구조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해놓은 내용이 있다. 그 내용 가운데 탑신은 2층부터 위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들어 차례로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졌다는데, 아무리인터넷에 올라 있는 탑의 사진들을 찾아봐도눈으로는 확인이 잘 되지가 않는다. 탑이 높아 밑에서 찍거나 아님 멀리서 찍은 것들이어서 2층 이상의 탑신들의 모습을제대로 보기가 어려워. 게다가 옥개석의 받침돌들도 위로 올라갈수록 돌의 수가 줄어든다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기만 하다. (교수님에게 물어봐야겠다. ㅠㅠ) 어쨌든 상륜부의 노반석에 대한 것이나 탑의 비례에 대한 내용은 처음 듣는 내용이라 눈여겨 볼 만하다 싶은 것이다. 옥개석 위에 탑신받침을 두었다 하는 것도 이 글을 보고서야……. 그런데 상륜부는 사라진 상태이고, 5층에 있는 사리함은 일본인에게 도굴된 뒤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던가.

<정림사지 5층석탑의 구조>

여러 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귀퉁이 기둥돌)와 탱주(지탱하는 돌)를 하나씩 세웠습니다. 1층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엔타시스가 분명한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습니다. 탑신 2층부터 몸돌은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한 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지붕돌의 아래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듭니다.

옥개석(지붕석)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지붕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서 간략화된 공포 형태를 재현합니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석을 두었습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합니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입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비례>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습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입니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됩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습니다. (퍼온 곳)

이정림사지는 탑도 중요하지만 절터 자체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사비 도읍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인 일탑일금당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안내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금은 황량한 절터에 탑이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 풀빛 표시가 된 곳이 금당(법당)이 있던 자리이며,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건물은 강당이 있던 자리를 몇 해 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 상을 이루고 있고, 탑과 금당이 각각 하나씩인 일탑일금당의 배치양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탑의 남쪽에 문처럼 난 곳이 중문이 있던 곳이며 중문에서 옆으로 나가다가 북쪽의 강당까지 풀빛으로 빙 둘러져 있는 곳이 회랑이 있던 자리이다. 그리고 중문보다 더 남쪽으로 나와서 있는 연못 두 개. (요즘 길목수 형님이 나의 전속 모델이 되었다. "거기에 서서 뭣 좀 설명해주는 것처럼 해 봐요." ^ ^)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가람배치도로 그려놓은 사진이 잘 나와 있는 게 있어 퍼왔다. 이 그림에서 지금 실제로 있는 것은 연못과 석탑, 그리고 복원된 강당. (퍼온 곳)


안내판의 그림은 예쁘게 그려놓았지만, 실제로 보면 이렇듯 황량하다. 사진에서 맨 아래 보이는 것이 두 개의 연못, 거기에서부터 북쪽으로 조금 더 가서 계단을 올라선 자리 쯤이 중문터가 되겠지 싶다. 그리고 탑이 서 있고, 그 뒤로 불전(금당)터가 있겠고, 그 뒤에는 복원해놓은 강당이 있는 모습이다.

이 쯤에서 다시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정림사지 터에 대한 설명을 함께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절과 탑이 많다 했는데 고작 남아 있는 탑이 둘 뿐이라니…….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탑 뿐 아니라 건축물 전반으로 백제의 문화제는 많지가 않아 아쉬움이 많다고 늘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농담삼아 그것들 다 남아 있으면 도면 외우랴, 건물 하나하나 살펴보랴 죽어났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 ^) 암튼 이렇게 일탑일금당의 배치 전형이 일본으로도 전해져 사천왕사(시텐노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한국건축사를 공부할 때 정리했던 것인데, 까먹었다가 이걸 보고 다시 생각났다. ^ ^ 그리고 남북으로 긴 방형의 절터를 만들어주는 회랑 형태가 직사각형이 아니라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 설명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중문 바깥에 있는 연못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연못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거고, 금당의 기단이 이중기단이라는 것도, 강당지와 회랑지의 기단이 기와로 되어 있는 와적기단이라는 것도, 석탑부가 판축지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모두 이 설명을 보면서 알게 된 것들이다.

<사비도성의 중심지 정림사>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 동, 서, 남, 북 등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불어 사찰이 건립되었습니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의 모습이 중국 사서「주서(周書)」백제전에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 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비성 도읍기의 사찰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지입니다. 게다가 정림사지는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구간 내에서도 중심지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정림사지가 사비도성을 조성할 때 일정한 계획 하에 조영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정림사지와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와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실 내지는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성의 공간으로 정림사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건축학적 의의>

정림사지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 구조입니다.

이 가람 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가람조영의 모태가 되어 백제와 동일한 일본의 사천왕사(시텐노지. 四天王寺) 양식을 낳았습니다.

정림사지는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이 아닌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입니다. 또한 중문 바깥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최고(最古) 연못이며 이러한 연못의 존재는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이 밖에도 정림사지는 금당의 이중기단, 강당지 및 회랑지의 와적기단, 석탑부의 판축기법 등 고대 가람의 특별한 형식을 보여주어 백제 건축의 사료적 의의를 갖습니다. (퍼온 곳)

둘러보고 나오다 보니까 이러한 조감도와 투시도들이 있었다. 정림사지를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는데 관련기사를 찾아보니 예산확보에 어려움이 많은가 보다. 2011년까지 총 예산 130억 원을 들여 복원할 거라는데 2008년 11억의 예산을 확보해 시작에 들어갔지만 2009년에는 6억원 확보에 그쳤고, 2010년에는 15억원 확보가 목표라는데 그건 어찌 될지 모르겠다 하고, 그렇게 되면 2010년 이후 확보할 예산이 98억원이나 되니 아무래도 2011년 이후로 사업기간 연장이 불가피할 거라면서 말이다. (무지하게 돈이 많이 드는구나 ㅠㅠ)

아무튼 원형복원 모습은이렇게 할 모양이다. (그림에서 저 위쪽에 있는 건 정림사지 복원과상관없는 박물관임.)

정림사지의 금당은 중층건물로 복원할 모양이네. 이런 건 제대로 고증이 된 건가 몰라. ㅠㅠ 문화재 복원은 원형유지가 기본, 최소한의 수리 및 복원이 원칙이고 고증이 되지 않은 것은 안 하는 게 원칙이라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경주의 월정교 복원도 제대로 된 고증 없이 복원을 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고, 황룡사 구층석탑도 마찬가지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각급 지자체들에서는문화재를 관광자원이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무분별한 복원 및 정비를 벌이고 있어 문제라는데……. (면접시험장에 가서 문화재 복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이런 관점에서 얘기해야 한다고몇 번이나 강조되던 내용이었다. ㅎㅎ이런 내용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나 왔으면 좋겠다.^ ^)

금당을 이층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강당은 저 뒤에 가려져 있는 모습이겠다. 남문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강당까지 이어진 긴 회랑이 마치 사찰을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아 지금의 황량한 느낌에 대면사뭇 분위기가 아늑하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복원한 강당이고, 그 앞에 포크레인 삽자국이 있는 흙바닥은 금당이 있던 터다. 저기에다 이층의 건물을 지어 복원하겠다는. 그리고 카메라의 위치는 석탑 앞.

다시 강당 앞으로 가서 뒤돌아 봤을 때는 이런 모습인데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비바람이 불고 있어서 그랬음. ㅠㅠ게다가 내 사진기는 약이 다 달아 길목수 형님걸 들고 다니느라 비에 안맞게 하느라고 ㅠㅠ) 암튼비석 앞으로 흙을 덮어놓은 곳이 금당터, 탑 너머에서 포크레인 작업을 하고 있는 곳이 남문터.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에는 각 건물의 복원 계획을 올려놓기도 했다. 적심석들이 그렇게 발견되었구나, 그것으로부터 유추해서 기단부를 추정하고 기둥 사이의 간격과 전체 건물의 폭까지도. (그런데 솔직히 강당을 복원해 놓은 걸 보면 도면으로 볼 때랑 뭔가 느낌이 많이 다르다. 길목수 형님 같은 경우는 엉터리로 지어놨다며 다시 지어야 한다고 내내 툴툴거리기도 했는데……. ㅠㅠ)

<정림사지 복원>

석탑에서 남쪽으로 19.98m 거리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초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석 밑에 깔았던 적심석은 거의 그대로 발견 되었습니다.

적심은 지표면에서 20~30cm 깊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기단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그 흔적을 그대로 인정하여 기단크기를 설정할 경우 너무 크기 때문에 이는 중문의 기단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금당의 기단폭을 중문에 적용하면 기단폭은 기둥 중심에서 약 3자 정도가 됩니다. 이 수치를 적용하면 기단의 크기는 동서 길이 약 13.1m, 남북너비 약 7.7m가 됩니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칸(11.3m), 측면 1칸(5.3m) 입니다. 이 수치는 적심석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문은 정면 3칸에 측면은 회랑과 같은 폭의 1칸 규모입니다. 기단은 가공석 기단으로 만들고 공포는 하앙식 공포를 짜 올렸으며, 지붕은 양쪽 용마루 끝에 치미를 올린 팔작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탑 중심에서 26. 2m 북으로 떨어져 금당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만 건물의 남북 중심선이 서쪽으로 24cm 치우쳐있습니다.

기단은 2중 기단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금당 기단 중 상층 기단은 훼손되어 규모를 알 수 없으나 하층기단은 적심석이 발견되어 그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정면 7칸(18.75m), 측면 5칸(13.8m) 크기입니다. 하층기단의 적심석을 기준으로 기단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동서 길이 20.55m, 남북길이 15.6m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강당은 금당에서 북쪽으로 31.7m 떨어진 지점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석탑으로부터는 59.97m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석탑으로부터 남북 중심축선을 그으면 동편으로 약 20cm를 벗어나 있습니다. 금당은 중심축선에서 서편으로 약간 치우친 반면 강당은 동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강당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재건된 것입니다.

기단의 구성으로 보아 원래 백제시대 강당이 있었으나 폐혀된 후 고려시대 재건하면서 기단을 새로 조성하고 백제시대 적심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굴 결과 고려시대 기단하부에서 백제시대 적심석 일부가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강당은 백제 때의 강당 크기를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기단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 결과 전면 기둥 중심에서 약 120cm 떨어진 곳에서 높이 50의 백제 기단 끝 부분이 확인되었습니다. 기단석을 만들었다고 본다면 대체적으로 기단 폭은 130cm 정도가 됩니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건물의 기단 전체 크기는 정면 27.4m, 측면 13.3m가 됩니다.

석탑과 금당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은 동서길이 52.2m, 남북길이 83.5m입니다.

강당과 금당 사이의 동편 회랑터에서 11개소의 적심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도리칸이 약 3.85m, 보칸이 약 4.2m입니다. 동회랑터의 남단은 훼손되어 기둥 간격을 알 수 없습니다.

서회랑터는 석탑과 금당 사이 부분의 기단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기단 폭은 약 5m 정도가 됩니다. 각각 40cm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동회랑의 기단 폭도 5m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동안 지표면의 교란이 심하게 있었던 것을 고려한 수치여서 많은 오차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퍼온 곳)

문제의 그 강당으로 가 보았다. 하앙식으로 지어놓았다 하니 더욱 끌려. 하앙식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화암사 극락전 뿐, 그곳에 가지 않는 이상 보기 어려운 양식의 건물이니 왜 안 보고 싶겠나. (물론 길목수 형님은 엉터리로 지은 거라고 계속 툴툴이긴 했지만. ^ ^)

사선으로 삐죽하게 뻗어내려오는 것이 하앙이다. 화암사 극락전은 하앙의 끝을 전면은 용머리로 초각했고, 뒷면에서 이와 같은 비죽앙 초각을 했는데, 복원한 정림사지 강당 건물은 앞뒷면이 모두 비죽앙으로 초각이 되어 있었다. 후대에 쇠서 초각을 낳게 된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하앙 밑에서 맞닿게 빗각을 깎아놓은 화두자라는 첨차 또한사진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 즈음에서 잠깐 강의실에서 공부했던 하앙 양식에 대해정리를 해 보면,

<하앙 양식의 구조>

하양 양식은처마를 바깥으로가장 많이 내밀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비가 많은 지역, 처마를 길게 빼야 하는 지역에서 특히 많이 보인다.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비가 많은 기후가 아니기 때문에 하앙 양식을굳이 써야 할 것까지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기후에서는 공포의 처마내밀기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달까.중국과 일본 같은 곳에서는 하앙 양식으로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때문에일본에서는 하앙이라는 건축 양식이 조선을 거치지않고 자기네가 중국에서 직접 전해받은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던가.하지만 우리나라에 하앙 양식의 건축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현전하는 것으로 유일한 화암사 극락전이 있고, 그것말고도 하앙의 유구라 할만 한 것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나타나는 곳은옛 백제 지역이다. 그 까닭은 백제가 중국 남쪽의 양나라와 교류가많았기 때문이겠다.

화암사 극락전만 해도 옛 백제 지역인 완주에 있고,하앙의 모습을 가진 금동 탑편도 부여 진천왕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첨차의 모습에서 하앙식에서 쓰였을 법한 화두자를 건물 뒷면에 중첩해 사용한 귀신사 대적광전 또한 백제 지역인 전북 김제에 있다. 화두자를 건물 뒷면에 겹쳐서 썼다는 것을 봤을 때 원래 하앙 양식이던 것을 양식을 바꾸어 복원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건물이다. 원래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하나씩 들어갔을 화두자라는 부재를 새로 복원하면서앞면의 화두자를 뒷면에 쓰느라 중첩해서 사용했을 거라며 말이다. 일제시대에 찍은 사진자료로 남아 하앙 양식이 쓰였음이 확인되는 금산사 금강문 역시 옛 전북 김제에 있다. (또 하나, 하앙 양식이 보여지는 유구인 금동삼존불감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만 나와 있지 어디에서 출토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ㅠㅠ) 아무튼, 이렇듯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하앙 양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옛 백제 지역들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우리나라는 중국의 남쪽이나 일본처럼 비가 그리 많이 내리는 기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앙 양식은 쇠퇴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면서 비죽앙으로 초각된 하앙 끝이 가앙이라는 양식을 나았고,이것이 다포의 첨차 끝을 밑으로강직하게 내리뻗은 쇠서 초각으로 이어지게되었다 볼 수 있다. 어쨌든 지금은 화암사 극락전 건물 하나만 전해지고 있지만 이 땅에서도 하앙 양식은 분명히 존재했고, 일본이한반도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앙구조의 특징이다.그 특징은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처마를더 깊이 낼 수 있는 출첨의 기능이 그 하나이고, 구조재로서 보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두 번째 기능이다.대들보 위에서하앙이 직접 도리들을받아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실내 공간의 높이를 높게 해주는기능을 하고 있어 하앙 양식에서는 평주와 내고주의 높이 차가 크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장식재로서의 역할인데,이는 물론 화암사 극락전 전면에서처럼 용머리 초각 같은 것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뒷면의 비죽앙 초각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중국에서는 하앙이라는 것이 신분을 나타내주는 상징이 되어 신분이 더 높을수록 하앙을 몇 개씩 겹쳐서 썼는데, 그러다보니 신분 상승을 할 때마다 하앙을 추가하려니매번 지붕을 다 뜯어내야하는 것이 번거로워졌고 그래서 가앙(가짜 하앙)이라는 것까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깥으로내리뻗은 하앙 초각처럼 생긴 나무 부재를 단위부재로 만들어서 지붕 전체를 바꾸지 않고도 바깥에서 끼울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러던 것이 나중에는 다포의 첨차 끝을 가앙처럼 초각하는 쇠서로까지 이어졌으니여기에서 말하는 장식재로서의 역할은 단순히 의장적 요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의 흐름까지 설명해주는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런데 앞서 정림사지 복원 계획 도면들을 보니 이미 복원된 강당 뿐 아니라 중문과 금당까지 모두 하앙 양식으로 복원할 거라 나와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 것이 제대로 된 고증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는 살짝 의심스럽기도 하다. 지금도 몇 군데 하앙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있기는 하다는데 교수님은 그 대부분이잘 안 되어 있다고 한다.이 땅에서 하앙 기술이 너무 오래 끊어지다 보니까 제대로 그것을 지을 줄 아는 기술력이 지금은 없는 것 같다며 말이다. 공산성에도 임유각을 하앙식으로 지어놓았는데 그 또한 매우 조악한 모습이라며 말이다.

복원해 놓은 강당의 측면에서 본 모습이다. 현전하는 유일한 하앙 양식의 문화재인 화암사 극락전의 종단면과 비교하면 화암사 극락전에는 쓰이지 않았던 종보가 이 건물에서는 쓰이고 있다는 게 눈에 띈다. 화암사 극락전에서는 종보가 없고 판재들을 겹쳐놓은 뒤 그 위에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받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화암사 극락전이 오량 맞배 건물이었고, 여기에서는 9량가 건물이어서 그런 것인지…….

강당 안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져다 하는 석불좌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찍은 사진은 시커멓게 잘 나오지가 않아 인터넷에 올라있는 다른 분의 사진을 퍼왔다. ㅠㅠ (퍼온 곳)

원래는 이렇게 바깥에 있었나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뤄진 팔각으로 불상보다 더 공들여만든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한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앙련)이고 하대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복련)을, 그리고 중대의 팔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眼象)을 새겨놓았다. 이러한 불상의 대좌는 부도탑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어 팔각연당형의 기단부에서 쓰이게 된다고 했다. (퍼온 곳)

강당 안에 있는 석불좌상에 대한 소개를 해주는 안내판.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거라는데 어느 자료를 보니 후대에 연자방아 맷돌을 조각하여 붙여놓은 거라 한다.

아, 이렇게 정림사지를 둘러보고 돌아나왔다. 저 자리에서 저렇게 천오백 년 가량을외롭게 서 있어온 탑. 당나라에게백제가 멸망할 때는 일주일이나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고,몸돌에 침략자의 글씨를 새기게 되는 치욕까지 당하기도 했던.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꼬마 적부터 다 보아왔을 저 탑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린가 하는 것을 생각했다. 길게 사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길게 살고 싶다는 것. 길게 보며, 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순간순간의 일희일비에 휘둘리지 않고…….

(답사를 다녀와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곳들이 법주사와 장곡사, 고산사 그리고 정림사지 탑과 장하리 탑, 서장리 탑, 지난 주 토요일에 다녀온 창덕궁까지. 일 시작하기 전에 이걸 언제 다 해 놓을까 하다가 요 며칠 하도 진을 뺏기에 법주사, 장곡사는 좀 더 미루고 나름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지 하고 손을 댄 것이 탑이었다. 이곳을 둘러보고 온 시간은 고작해야 한 시간이 못 되었을 텐데, 정리만 꼬박 열네 시간이 걸렸다. 두어 시간이면 탑 하나씩 정리할 수 있겠거니 싶었건만. 아,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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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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