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숙

굴 속의 시간 2010. 9. 8. 03:19

우려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특별히 프로그램이랄 것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한 번모여 서로 공부한 거 가지고 같이 얘기나 해보자 하는 정도였으니 자칫 하면 정말대책없는 엠티정도나 되고 말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이 모여 둘러 앉았지만 기대 이상으로 알차고 열띤 시간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렇게 오가는 얘기들 가운데 반은 못알아듣고 있는 나 자신이 딱하다싶은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좋았다. 다시 설명해 주세요, 아직 이해가 안 돼요, 그럼 그건 왜 그렇게 되는데요, 아오 클났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 나 때문에 몇 번이나제자리 걸음을 해야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고맙기만 했다.

정말 입이 쫙쫙 벌어졌다. 그동안 공부한 보따리들을 풀어 보이는데 우아아, 우아아였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속으로는 나 또한 나름 열심히 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참은 멀었구나, 이 정도로는 될 일이 아니구나 하는 걸 또 한 번 여실히 느끼기도 했다. 펼쳐 보이는 노트며 파일을 보며 뜨아했던 건 둘째치고,끝내 기겁을 하고 말았던 건 그 손가락 마디들에 배겨 있는 굳은살들이었다. 정말 콩알만한 것들이 입으로 깨물어도 될 것처럼 딴딴하게 붙여 있어. 내가 펜 열 자루 산 거 다 썼다고 뿌듯해하던 기분 같은 건 어디 쑥스러워 내밀 건덕지도 안 되는 거였다. 기술사 시험은 시험장에서 머리로 생각해가면서 써서는 될 게 아니라고, 문제 분석이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머리가 아니라 손이 알아서 저절로 쓰고, 그릴 수 있어야 된다고 하던 말은 괜히 하는 말들이 아닌 거였다.

원선생님이야 이미 지난 해 시험을 쳤을 때 대부분이 전공과목에서 통과를 못해 떨어진다는 그것들에서는 이미 합격점을 넘었더랬다. 그런데 어이없게 국사니 건축사, 보호법 같은 이른바 평균 점수 올려주는 기본 공통 과목에서 점수를 못받은 바람에 이번에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하시는 건데, 그러한 분이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양의 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해놓고 계셨다.아우, 난 그동안 뭘 한 거니,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역시 현장 시공 부분을 바라보고읽어내는 부분에 있어서는 길목수 형님의 눈은시야가 넓고도 예리했다. 마침 운이 좋게도 집에서가까이 있는 장릉에서 수복실의 해체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그곳을 함께 찾았는데,형님의 눈을 통해 보는현장 공부는 새로이 각인케 해주는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 번 최목수랑 같이 찾아갔을 때도 사진기를 들고 가지 않았던 걸 아쉽다 했는데, 이번에도 또 챙겨가질 못했네.

꽉 찬 일박이일이었고, 그만큼함께 한 분들에게 고마움이큰 시간이었다.물론 덕분에 나는 또다시작아진 마음에,무엇부터 모자람을 더 채워야할지 마음이 급해지고 혼란스러워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공부란 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게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해가는과정 아니겠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안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가를깨달아가는 과정이거나. 고작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이 조그만 집에 꽉 차게 함께 하며,꽉차는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그만 돌아간다 할 때는 마음이 크게 허전하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 오로지 혼자 나머지 시간들을견디고 채워야 할 일이다. 한참 진지한 이야기들을 할 때 내가 슬그머니 사진기를 집어들면 아유, 무슨 사진을찍고 그래, 하곤 했지만,열띤 토론을 하다가도 나는문득문득 이 순간들이 너무 좋아 이렇게나마 잡아두고싶은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놓고는 사진 찍느라 설명 못 들었다고 다시 설명해달라고막 그런다. ㅎ) 아유, 공부는 안 하면서 자꾸 이런 감상에 빠지고 그래서 큰일이야. 그러나 순간순간 감동이 차오르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지.









(하하, 이 노래는 꼭 내 움츠러든 마음을 알고 일부러 위로를 해주려 불러주는 노래 같으네. 그래, 이 노래말에 나오는 말처럼 '뒤를 돌아봐 벌써 이만큼 온 거잖아'다. 하긴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아주 까막눈 아니였냔 말이지. ^ ^)

괜찮아 / Verandah Project (김동률, 이상순)

함께 출발한네 친구들이
어느새 저만치 앞서 달릴 때
닿을 듯 했던 너의 꿈들이
자꾸 저 멀리로 아득해질 때
그럴 때 생각해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너를 더욱 빛나게 할 거야
괜찮아 힘을 내 넌 할 수 있을 거야
좀 서툴면 어때 가끔 넘어질 수도 있지
세상에 모든 게 단 한번에 이뤄지면
그건 조금 싱거울 테니

너보다 멋진네 친구들이
한없이 널 작아지게 만들 때
널 향한 사람들의 기대로
자꾸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그럴 때 생각해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너를 더욱 빛나게 할 거야
괜찮아 힘을 내 넌 할 수 있을 거야
좀 더디면 어때
꼭 먼저 앞설 필욘 없지
저 높은 천상에 너 혼자 뿐이라면
그건 정말 외로울테니

괜찮아 힘을 내 넌 할 수 있을 거야
뒤를 돌아봐 벌써 이만큼 온 거잖아
언젠가 웃으며 오늘을 기억할 날에
조금 멋쩍을지 몰라 너도 몰래
어느새 훌쩍 커버린 너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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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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