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답사 7

굴 속의 시간 2010. 3. 16. 23:35

덕수궁 대한문

환구단 정문을 나설 즈음에는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큰 길만 건너면 덕수궁. 어차피 월요일이던 그 날은 덕수궁도 창덕궁도 가볼 수가 없어 그곳들은 젖혀놓고 있었지만,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라면 휴관이더라도 그 바깥에서 충분히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그 전날 오후 건축시공 강의를 받으면서 대한문의 기둥 동바리를 한 방법이 흔히 쓰이는 나비장 맞춤이나 주먹장 맞춤이 아니라 촉 이음을 했다 하여 더욱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청 광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대한문 쪽으로 갔다. 한참 촛불을 밝히던 때 몇 겹으로 싸인 경찰들에게 갇혀 있던 광장, 그리고 그렇게 촛불을 밝히러 나갈 때면 이정표가 되던 대한문….

대한문은 궁궐의 정문이지만 단층 건물이다. 경복궁의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 모두 중층이었고, 창경궁의 정문인홍화문이 중층이던 것(창덕궁의 돈화문 역시 중층건물)에견주면궁궐 정문으로서는 작은 건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의 정문으로는 이곳 덕수궁의 대한문과 경희궁의 흥화문만 단층이라 할 수 있겠다. 궁금하여 대한문에 대해 더 찾아보니처음 덕수궁(그 때 이름은 경운궁)의 정문은남쪽에 있는 인화문이었다 한다. 그렇게 보면 궁궐의 정문들에는 모두 '화'자가 들어가는 광화문, 돈화문, 흥화문, 인화문, 홍화문이겠으니 말이다.그러니 처음에는 인화문을 정문으로, 대한문(그 때 이름은 대안문)은 편문 역할만 하고 있었지만,1906년 화재로 중화전 등을 복원하면서동문인 대안문을 수리하면서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정문으로삼았다고 했다.그 뒤로 몇 차례의 도로 확장 공사를 거치면서 대한문은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나게 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 거라 한다. (원래의 자리에서 33미터 뒤로 물러난 자리).그래서 문 앞의 기단과 크고 웅장한 계단 따위는 모두 아스팔트에 묻히게 되었다고….

자료들을 찾아 읽다보니 덕수궁이라는 현재의 명칭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덕수궁이라는 뜻은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라는 뜻이지만 일제가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순종을 왕의 자리에 앉히면서 (또한 1910년 한일합방을 하면서 황제국이던 대한제국을 다시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왕의 나라)로 격하시키면서) 마치 고종을 물러난 왕이라 조롱이라도 하듯 부른 이름이다. 사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이 때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선초기에도 쓰였다 하는데 정종과 태종 당시 왕위를 물려준 태조와 정종의 궁호로 덕수궁이라 하면서,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궁궐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상왕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쓰여온 것이다. 그러나 상왕이 죽게되면 본래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인데,고종이 죽은 뒤에도 경운궁은 여전히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보여지듯 정면은 세 칸이고, 측면은 두 칸으로 된 다포계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매표소 옆에 서 있는 궐내 모습을 보여주는 안내판인데 월요일이 아닌 어느 날덕수궁과 창덕궁에는 다시 찾아와야겠지.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자리 어디 있겠냐만은 덕수궁의 역사는 구한말 격동의 아픈 역사와 고스란히 함께 하고 있더라.

공포는 화려한 다포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외2출목, 내3출목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초공의 모습도 기둥 윗머리에서 창방과 평방, 그리고 주두까지 잡아주는후기 양식이다.


까치 부연이라는 것은 이 건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처음 알았다. 함께 간 두 분이 "어, 까치부연이 들어가 있네." "네, 그러네요." 하고 말을 하는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 그게 무언가 하니 이처럼 규모가 큰 우진각, 혹은 팔작지붕에서는 추녀 옆으로 이어지는 선자연 부분이 연목 부분과 부연 부분에서 각이 크게 벌어지면서 특히 초장 쪽 간격이 커지게 되기 때문에 나오는 거라 했다. 사진에서 보면 추녀에는 연목 초장이 붙어 있고 사래 옆에는 부연 초장이 붙어 있다. 일반적인 건물에서는 연목과 부연이 일대일로 같은 갯수로 나가게 되는데, 이 건물에서는 연목의 초장과 두번 째 장 간격에 비해 부연의 초장과 두번 째 장 간격이 너무 크게 벌어지므로 그 사이에 연목 배열에는 없는 부연을 하나 더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격을 맞추기 위해 연목 배열과 맞지 않게 끼워 넣은 부연을 까치부연이라고. 아아, 그렇구나. (<<한국건축용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부연을 설명하면서 살짝 언급을 하고 지나가는데, 그 책에는 '세발부연'이라 나와 있다.)




대한문의 기둥이다. 주초 위에서 한 자 반 정도 높이 위에서 다시 맞춰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자리에도 두 기둥의 이음부를 장부로 맞춘 자리가 없다. 보통 기둥 동바리(기둥 밑둥이 썪거나 부식되었을 때 그 부분을 교체, 수리하는 것)를 할 때는 주먹장 이음이나 나비장 이음으로 한다고 하는데 대한문은 이례적으로 기둥 안에서 위아래의 기둥에 모두 촉구멍을 파고 그 사이에 촉을 꽂아 촉이음을 했다. 교수님 설명으로는 대한문의 기둥 동바리를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수리를 할 때 기둥 동바리만 한 것이 아니라 지붕을 다 들어내는 수리였기에 이 방법을 썼을 거라는 거였다.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기둥 동바리만 하게 되면 자키로 기둥을 살짝 들어 밑부분을 잘라내고, 교체하는데 촉이음방식을 하려면 최소한 그 촉 높이 이상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방법은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고, 솔직히 나는 덕수궁 대한문 보수공사가 몇 해 전에 있었다 하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기사를 찾아보니 2004년부터 공사에들어가 1년 9개월을 보수하고2005년 12월 31일 개방했다는데,애써 떠올려보면그 앞을 덧집처럼 가려놓고 있던 모습이 언뜻언뜻 기억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여간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통 공사판이던 기억만 있으니 그 앞을 지날 때도 또 뭔 놈의 공사를 하는가 보다 하고만지났나 보다. ㅠㅠ)

이렇게 두 번째 답사를 마쳤다. 다니면 다닐수록 내가 모르는 곳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던 걸음이었다. 그러나 직접 찾아가고, 도면과 자료로만 보던 것을 확인하니 그건 종잇장을 넘겨가는 공부와는 정말 차원이 다른 거였다. 아직도 서울에서는 찾아가야 할 곳들이 얼마나 많은가. 창덕궁에 덕수궁, 경희궁과 동궁, 그리고 숭례문과 흥인문, 돈의문, 숙정문. 서울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생각만 해도 벌써 설렌다. 전체구간 17.8키로니 보통 걸음으로 여덟아홉 시간 코스 정도가 된다던가. 대청봉 올라갔다 오는 정도가 될 테니 결코 만만한 길은 아니다. 그래서 더 좋아. ^ ^ 여기에다가 더 다니자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탑들과 서울역사박물관의 자료들, 민속박물관 같은 곳까지 어휴, 많다. 농담삼아 말하면서 로마나 빠리 이상 가는 곳이 서울이라 했지만 정말 그러하다.

이 날 걸은 것만 해도 결코 만만치가 않아. 구두를 신고 걸었더니 집에 들어갔을 때 양말에는 시커멓게 가죽물이 들어 있는 정도였다. 가장 아픈 곳은 목이었어. 내내 고개를 쳐들고 지붕 위를 살피며 다녀야 했으니, 하필 이 날 따라 엄마가 사준 새 남방을 입고 다니느라 목에 있는 깃에 자꾸만 쓸려서 벌겋게 줄이 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ㅎㅎ 그래도 좋았다. 대한문에서 헤어질 무렵은 이미 어둠이 짙었고, 길목수 형님과는 아쉬워 그 앞에 있는 허름한 국밥집에서 콩나물국밥 한 그릇씩을 먹고 헤어졌다. 우와, 맛나다. 이 공부 시작하면서 끝내주는 콩나물국밥집을 벌써 두 군데나 알게 되었다. 이것도 소득이라면 큰 소득 ㅎㅎ

지난 주 월요일의 서울 답사한 것을 일주일이나 지나 겨우 정리했다. 그러니 주말 강의시간에 배운 것들은 또 어떡할 거며, 어제 보은 지역 답사를 하고 온 건 또 어쩔 거야. ㅠㅠ 이래저래 자꾸만 밀리고 처진다. 하지만 재미있으니 엉금엉금 기어간다. 가야할 길이 너무 멀지만 그래도 엉금엉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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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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